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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리뷰 & 분석

2021년에 해본 바이오하자드 4는 어떤 게임?

살면서 내가 좀비 게임을 해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영화, 게임 불문하고 호러 컨텐츠라면 한사코 거부했던 타고난 쫄보 멘탈을 극복하고 <바이오하자드 4>에 도전해봤다.

 

호러 게임의 대명사인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의 명성에 비해 바하 4, 5, 6는 공포 요소가 상당히 희석된 것이 다행이었다.

 

자, 긴 말은 뒤로 하고 차근차근 살펴보자.

 

 

얼마나 무섭나?

사실, 초반부에 한번 적응하고나면 크게 무서운 순간은 없는 편이다.

 

바하 4는 오컬트적인 음산한 분위기에 좀비들이 나오는 액션게임으로 생각하면 된다.

 

총탄에 머리가 터지고 피가 튀는 연출도 현대 3D 기술에 적응한 눈에는 다분히 게임스러운(?) 이펙트로 보였다.

 

다만, 모든 호러 요소가 그러하듯이 뭔지 모를 소리가 들린다거나, 한번도 본 적 없는 몬스터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에는 다소의 공포감을 느낄 수 있다.

 

원샷킬 당할까봐 무섭다.

 

무지에서 비롯한 공포라고 할 수 있겠다.

 

중반부, 후반부에 나름대로 어두운 환경을 활용하여 으스스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구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바하 1 리메이크나 RE:2(바하 2 리메이크)의 공포감보다는 가벼운 편이다.

 

'호러'에 한정해서 봤을 때 바하 4는 호러 게임 입문작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웬만해서는 나같은 호린이도 중도포기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

 

 

움직이며 쏠 수 없다.

콘솔 슈팅게임 조작이 어느정도 표준화되고 익숙해진 2020년대 기준으로 바하 4의 조작방식은 상당한 불편함을 야기할 수 있다.

 

첫번째로, 이동하면서 시점을 움직이기 어렵다.

 

왼쪽 스틱으로 이동 자체가 우선 불편한 것이 좌우 입력이 횡이동이 아니라 회전이다.

 

이동은 카메라 기준으로 앞뒤로밖에 안 되고, 좌우로 이동하려면 캐릭터를 그쪽으로 회전시켜야만 가능하다.

 

오른쪽 스틱 카메라 조작도 지금처럼 조작계와 카메라가 함께 움직이는 게 아니라, 스틱을 기울인 만큼 일시적으로 시점만 돌아가기 때문에 상당히 불편하다.

 

나는 결국 엔딩 볼 때까지 오른쪽 스틱은 거의 쓰지 않고, 왼쪽 스틱으로 몸과 카메라를 같이 돌리는 방식에 익숙해졌다.

 

또한, 일단 조준 모드에 들어가면 이동이 안 된다.

 

바하 4는 원작인 게임큐브 버전에서 원래 조준을 이동과 동일하게 왼쪽스틱으로 하는 게임이었다.

 

애초에 설계 자체가 조준이동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엔 크게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숄더뷰를 채용한 3인칭 슈터 방식을 거의 최초로 제시한 게임이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완성된 조작체계가 당시엔 없었다는 점.

 

또 한가지는 바하 시리즈 특유의 디자인 철학이 반영된 요소라는 점.

 

즉, 전작 1, 2, 3편이 마치 CCTV로 보는 듯한 정적 카메라와 방향키 이동 방식으로 플레이어에게 제약을 가해 공포감을 조성했다면, 바하 4는 이동을 할 것인지, 전투를 할 것인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하게 만듦으로써 긴장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3인칭 관찰자 시점 <바이오하자드 1 리메이크>

 

개인적으로는 당시의 기술적 한계와 3D 조작체계의 미성숙함으로 인해 발생한 불편함이 호러 장르 특유의 느린 템포, 사각의 필요성과 만나 긍정적인 시너지를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클래식 바하의 문열기 애니메이션은 게임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로딩 스크린 중 하나로 손꼽힌다.

 

 

단테가 순수 인간이었다면? - 레온 S 케네디

닮았어. <데빌 메이 크라이 3>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캡콤 액션의 아이콘인 단테는 악마와 인간의 혼혈이라는 설정이라 기본적으로 무지하게 강한 캐릭터다.

 

이런 단테에게서 악마의 힘이 빠지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더해지면 바하 4의 레온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서운 좀비가 나타나도 쪼는 법이 없고, 각 챕터의 보스들과 대면했을 때도 치명적인 비꼬기 스킬로 되려 대화를 리드한다.

 

잘생긴 외모와 화려한 전투스킬도 단테를 떠올리게 한다.

 

인생샷

 

바이오하자드의 주역 캐릭터들은 최초 등장 작품 이후로 점점 성격이 다크해지곤 하는데, 레온 역시 2편에서 온갖 바이오 실험체들과 지옥 한가운데서 뒹굴었다보니 이제 초짜 경관의 풋풋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전형적인 악당 분위기의 보스 캐릭터들에게 시원시원하게 일침을 넣는 레온의 모습에서 좀비 게임의 클리셰를 부수는 쾌감마저 느낄 수 있다.

 

 

짐덩이지만 세상 착한 파트너

선남선녀

 

TPS로 전환한 것 외에 바하 4의 큰 특징이라면 역시 파트너 시스템이다.

 

대통령의 딸, 그러니까 현대판 공주님인 애슐리를 구해내는 것이 스토리의 주된 목표다.

 

따라서 게임의 진행은 크게 애슐리를 찾는 구간과 애슐리를 데리고 다니는 구간으로 나뉜다.

 

애슐리를 데리고 다니는 구간에서는 적들이 애슐리를 데려가거나 죽이지 못하도록 지켜야하기 때문에 난이도가 올라간다.

 

좀비 도살자나 다름없는 레온과 달리 애슐리는 전투 관련한 어떤 능력도 없기 때문에 짐덩이로 느껴질 수 있다.

 

두 사람이 협력해야 풀 수 있는 퍼즐도 존재하는데, 그 중 절반은 레온 혼자 풀 수 있게 해놨어도 별 차이 없었을 작은 기믹들에 불과하고, 나머지 절반은 퍼즐을 풀면서 동시에 애슐리도 엄호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 전투와는 차별화된 플레이 경험을 제공한다.

 

위협요소 없이 단시간에 풀리는 2인 퍼즐들은 플레이어가 애슐리와 협동하며 유대감을 쌓을 수 있도록 중간중간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흔히 파트너 시스템의 고질적인 단점으로 거론되는 플레이어 길막기, 엉뚱한 데서 죽기, 아이템 낭비하기 등의 문제 없이 얌전히 잘 따라다니는 순한 파트너이기에, 성가시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잿빛과 핏빛으로 얼룩진 음산한 장소에서 한 떨기 꽃처럼 밝게 빛나는 소녀를 지켜줘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다면 모를까.

 

 

바하다움?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팬들은 조작방식부터 아이템 관리, 퀘스트 준비 등 시리즈 전통의 온갖 불편한 요소들을 한데 묶어 '몬헌다움'이라고 칭하곤 했었다.

 

그 자체로 게임 특유의 '맛'이 되기도 하지만, 신입 유저에게 진입장벽이 될 수 있어 호불호가 갈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몬헌다움'이었는데, 몬스터 헌터 월드에서 시스템을 크게 개선한 후로는 옛말이 됐다.

 

바하에도 일종의 '바하다움'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비선형성이다.

 

비선형성이란 일자식으로 쭉 따라가면 게임이 진행되는게 아니라 여기저기 헤매고 찾도록 만들어진 구성을 의미한다.

 

클래식 바하 시리즈는 방 열쇠라던지, 막혀있는 기믹을 해제할 특수 아이템을 다른 곳에서 획득해 오도록 만들어 플레이어가 자연스럽게 탐험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게임이었다.

 

어디부터 가야하나. <바이오하자드 1 리메이크>

 

따라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거나, 이미 가봤던 장소에 다시 찾아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 점은 메트로배니아나 다크소울 시리즈 등 적극적인 탐험이 강조된 게임에서 흔하게 보이는 요소이지만, 아무래도 호불호가 갈리기 마련이다.

 

단순하게 쭉쭉 앞으로 진행하며 좀비를 무찌르고 싶은 플레이어가 왜 없겠는가.

 

바하 4는 백트래킹(되돌아가기)을 최대한 배제하고, 전체적인 진행을 일자식으로 구성해 플레이어가 액션에 집중하도록 만든 점에서 비선형성이라는 요소는 거의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바하다움'의 두 번째 요소는 아이템 관리다.

 

바하 1, 2, 3은 인벤토리 칸이 굉장히 적어서 생존에 필요한 무기, 탄약과 약품, 진행에 필요한 키 아이템을 알맞게 채워넣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특징인 게임이었다.

 

필요한 아이템을 미처 못 가지고 온 바람에 아이템 상자로 되돌아가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에 비하면 바하 4는 인벤토리가 일단 엄청나게 넓다.

 

보통 이렇게 정돈하고 다니진 않는다.

 

상인을 통해 가방을 더 늘리고 나면 온갖 무기와 함께 탄약과 약품을 최대한 쟁여놓을 수 있을 만큼 칸이 넉넉해진다.

 

아이템 가지러 되돌아간다는 개념은 아이템 상자와 함께 사라지고, 대신 무기 상인이 구간마다 등장한다.

 

 

'바하다움'의 마지막 세 번째 요소는 퍼즐이다.

 

클래식 바하는 좀비가 나오는 퍼즐 어드벤처라고 해도 될 정도로 퍼즐 풀기의 비중이 큰 게임이었다.

 

특정 구간을 통과하거나 키 아이템을 획득하기 위해 조각 맞추기 같은 미니게임이나 젤다 스타일의 돌 밀기 등 다양한 퍼즐이 주어지곤 한다.

 

방문마다 그에 맞는 열쇠를 찾아와야 한다던지, 아이템을 서로 조합해 새로운 아이템을 만드는 것들도 크게 보면 모두 퍼즐이다.

 

바하 4는 이러한 퍼즐 요소를 상당히 경량화 했다.

 

아이템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중요한 비밀을 찾는다거나, 조합을 통해 키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요소가 거의 없어졌다.

 

최신작들은 다시 퍼즐 요소가 강화됐다. <바이오하자드 2 리메이크>

 

아이템 조합은 약품을 만들거나 골드를 버는 수단 등으로 선택적인 용도에만 쓰인다.

 

던전 퍼즐도 매우 단순해져서 웬만하면 문여는 장치 한두개 찾아내는 선에서 완료된다.

 

퍼즐 자체의 참신함보다는 푸는 과정에 전투를 적절하게 섞어서 액션성을 유지하는 편이다.

 

 

결론

혹자는 바하 4가 자신의 인생게임이라고 한다.

 

매체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게임 순위 TOP 50 등에서 바하 4는 상당히 자주 볼 수 있을 정도로 게임사에 큰 획을 그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플레이 했을 때에도 조작에서의 불편함을 극복하고나니 특유의 몰입력으로 계속해서 패드를 붙잡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다만, 바하 시리즈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100% 동의하진 않는다.

 

같은 시기에 플레이한 바이오하자드 1편의 리메이크가 개인적으로는 시리즈의 고유한 정체성을 더욱 맛깔나게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바하 4는 이후의 게임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걸작이고, 지금 플레이해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시리즈 고유의 재미요소를 과감히 벗어던진 이단아이기도 하다.

 

내 취향으로 말하자면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헤매는 것도 이후에 느낄 성취를 위한 좋은 게임적 장치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혼자할 때는 물론, 친구가 옆에서 구경하고 있을 때에도 함께 고민하고 도전하게 만드는 비선형적 퍼즐식 구성이 바하 4에서는 많이 희석됐다.

 

그 점이 아쉬웠지만, 무릎 꿇은 좀비를 붙잡고 수플렉스를 시전하는 레온의 모습이 누구에겐들 매력적이지 않겠는가.

 

전작들을 해봤다면 너무나 통쾌할 액션

 

최신작 바이오하자드 빌리지가 바하 4의 시스템을 상당부분 차용한 것이 확인된 지금, 시대를 초월하는 이 매력적인 슈팅액션의 진수를 직접 맛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